80년대가 궁금하다고? 그럼 오승연을 만나 봐
경아가 있었다. 이화와 영자도 있었다. 거칠고 폭력적인 산업화를 통과하면서 농촌과 여성은 내내 도시와 남성의 식민지였고 그들의 풍파 많은 이야기들은 문학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당사자들이야 눈에서 피가 나올 삶이었겠지만 일천한 문학 전통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를 상징하는 여성들의 이름이 남아 대를 잇는 것은 어쨌거나 기특한 일이다.
그런데 80년대는 그 상징적인 이름이 없다. 파란만장했던 그 시대를 여성들은 단체로 비껴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럴 리 없다. 그 누구도 해학적으로 폭압이었던 80년대를 샛길로 지나갈 수는 없었다. 어떤 분은 노은림이나 한윤희가 있지 않으냐 물으실지 모르겠다.
오래된 고등어라는, 꽤 재미를 본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미안하지만 둘은 아니다. 일단 캐릭터의 완성도에서 함량 미달이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밀교 집회에 처음 참석한 초심자들이 흔히 보이는, 호기심과 불안감 섞인 흥미 그리고 빨리 저 무리에 합류해야겠다는 까닭 모를 조바심뿐이다.
여자는 대부분 호기심 때문에 망한다. 그 둘도 그렇게 망했을 뿐 80년대는 그저 병풍이거나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었다. 차라리 그보다는 86년 늦은 봄날 한강에 몸을 던진 현실의 여대생 하나가 더 문학적이고 상징적이다.
전위에 서지도 못하고 민중을 사랑할 수도, 사랑하는 척 흉내도 낼 수 없어 떠난다는 그녀의 유서를 듣고 오래 술을 마셨던 기억이다.
문학적 인물의 부재도 문제지만 시각도 문제다. 80년대를 다룬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른바 서울의 메이저 대학 출신들이다. 80년대 학생 운동사의 절반이 서울대 운동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이해는 간다.
그러나 그들만 시대에 뛰어들어 목청을 높인 것은 아니다. 그 숫자의 열 배, 스무 배의 서울 변두리와 경기도 그리고 지방 아이들이 있었다.
한열이와 종철이가 같은 과 친구고 미문화원을 점거한 것이 ‘우리 학교’ 애들인 아이들과 달리 이들은 시위를 하기 위해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야 했다. 그들에게도 고민과 열정은 있었지만 발산의 통로는 제한적이었고 주체라기보다는 항상 객체나 보조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다수였고 열정적이었지만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마이너 캠퍼스 아이들의 이야기를.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다뤄 주길 바랐지만, 없었다. 경기도 변두리 학교가 무대인 이 소설이 반갑고 고마운 이유다.
거기서 끝? 아니다. 이 소설의 진짜는 그 ‘운동’이라는 것의 실상이었다. 미화되고 사후 편집되어 하나같이 아름다운 희생으로 분칠한 그 실체.
무인 정권은 물리적인 힘으로 무장했지만 총기 소지도 안 되는 나라에서 ‘운동의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도덕밖에 없었다. 옳고 그름의 잣대로 이들은 무인 정권을 공격했고 자신들을 도덕으로 포장했다. 그러나 도덕은 개인의 몫이지 집단의 지침이 될 수 없다.
도덕이 집단의 정체성이나 목적이 된 끝에 벌어진 것이 1991년 문을 닫은 볼셰비즘의 수많은 폐악이고 크메르 루주의 악행이다. 그러니까, 가짜 도덕이었다.
집단 최면에 홀려있던 운동의 아이들은 허언증 환자처럼 몸과 마음과 머리가 따로 놀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도덕을 외쳤지만 몸은 부도덕이 너무 좋았다.
고맙게도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운동의 논리가 있었고 군사 정권을 작살 낼 수 있다면 시시한 도덕적 위반은 얼마든지 저질러도 되는 하찮은 일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도덕은 다만 보여주기 위한 ‘척’이었다. 착한 척, 선한 척, 정의로운 척. 그 3척으로 운동의 아이들은 갑주를 지어 입었다. 약자일 때는 결함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이 바뀌고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서 이들의 가짜 도덕은 악취를 풍기며 하나씩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현재 586세대가 저지르는 온갖 구역질나는 행태의 기원이자 이들의 특징인 자기 동정, 자기 연민이 가소롭고 짜증 나는 이유다. 박선경의 소설은 이 지점을 파고든다.
운동의 아이들이 가진 도덕적 우월감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선민의식이 얼마나 허상이며 사기이고 기만인지 사정없이 폭로한다. 도덕적 우월감이 저지르는 범죄는 한마디로 너와 나는 같지 않으며 거대담론을 끌고 나가는 자신들은 타인의 삶을 사소하게 여겨도 좋다는 놀라운 발상이다.
따라서 이들에겐 애초부터 죄책감이 자랄 토양이 없다. 소설에서 변태섭은 윤희숙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망가뜨리면서도 일말의 반성이나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민주를 위해 민을 겁탈하고 학살하면서 어쩔 수 없는 콜래트럴 데미지로 치부하는 동시에 자신은 그럴 권리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위선과 정신질환이 뒤섞인 변태섭의 정신세계는 특별히 유난한 것도 아니고 그들 세계에서는 보편이고 일상이다. 그래서 자기 여자를 상납하고 받는 자도 태연히 받아먹는 것이다(직유법이다).
‘척’도 박선경은 놓치지 않는다.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며 여학생들에게 가슴을 까보이게 하는 이 진보‘척’은 또 얼마나 불쾌하고 불결한가.
물론 소설이지만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이벤트를 글로 접하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다. 또 하나 박선경이 족집게로 집어내고 있는 것이 이들의 심각한 무지다.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을 미화하여 아이들의 머릿속을 파괴하고 환상을 심어준 한 언론인의 세계관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바보들과 한반도 중심의 우물 안 사고로 협소한 역사관을 가진 머저리들을 제대로 풍자한다.
박선경에게 운동의 아이들은 ‘척’하는 바보들이었고 덕분에 80년대는 참담한 지적 빈곤의 시대였다. 문제는 그 초라한 사고와 철 지난 이념이 아직도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원고를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타인의 글을 읽으면 그 작업에 들어간 속칭 ‘공사비’ 견적이 나온다. 시간과 노력이 투여된 만큼 나오는 것이 글이고 그게 박선경의 소설에서는 거의 무제한으로 투하되었다.
학생운동과 관련된 자료는 다 읽고 가담했던 사람들은 다 만난 것일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자료조사와 크로스 체크로 작가는 어쩌면 운동의 아이들도 잘 알지 못할 이야기들을 저인망으로 수집했고 이를 기가 막히게 풀어냈다.
덕분에 주인공인 승연 아버지의 죽음이나 남자 친구인 태주가 1987년 당시 대통령 선거 당시 사망한 것은 실제 있었던 사건들과 겹치면서 짜릿한 독서 체험을 안겨준다.
물론 사실의 문학적 형상화 사례는 더 있지만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이쯤에서 줄인다. 성적 묘사는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첫 페이지부터 박선경은 거침이 없다. 그러나 이 도색적인 문장들이 하나도 자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으니 그 또한 재주다.
평소 성적으로 예민하다고 자부하던 내가 왜 윤희숙의 포르노에 가까운 고백을 들으면서 흥분은커녕 슬퍼졌는지 모르겠다. 그 방면으로도 소질이 충분하니 다음에는 오로지 흥분이 넘치는 소설을 기대한다.
박선경은 이번이 첫 소설이다. 그러나 발표만 하지 않았지 이미 늘 작가였고 다만 더 이상은 침묵할 수 없어 머릿속 구상들을 이번에 글로 엮었을 뿐이다.
소설의 현실적 배경이 되는 것이 2022년 대선이고 책의 출간이 2024년 총선을 앞둔 시점이라는 것이 그 증명이겠다. 문학적으로는 글의 수준을 논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소설로 한국 문학이 80년대를 대표할 수 있는 이름으로 오승연이라는 캐릭터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80년대가 궁금하다고요? 그럼 이 여자를 만나보세요,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선경이라는 중량감 있는 작가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이제껏 어설프게 그리고 외눈으로 절반의 사실을 외면한 채 80년대를 묘사한 작가들에게 박근형 연극의 대사 하나를 먹이는 것으로 이 소설에 대한 평을 대신한다.
“니들이 창조와 기록의 차이를 알아?”
_남정욱(소설가·전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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