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지켜야 할 세계』가 다산책방에서 출간되었다.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은희경·전성태·이기호·편혜영·백가흠·최진영·박준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한 가족의 불우한 서사와 불온이라 낙인찍혔던 노동운동사가 함께 맞물려 있으며, 인간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돌봄’의 방식을 유려한 세목과 안정감 있는 분명으로 구현”해 냈다고 평했다.
특히 “매끄러운 서사의 흐름 속에서도 중간중간 읽는 이의 시간을 정지시킬 만큼 감동적이고 울림이 큰 대목도 많았다”라고 덧붙였다. 소설이 가진 가능성, “그것도 장편의 방식으로만 가닿을 수 있는 세계가 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게 한 이번 수상작은 읽고 난 후 오랫동안 ‘내가’ 혹은 ‘우리가’ 지켜야 할 세계를 곱씹게 한다.
당선자 문경민 작가는 청소년소설 『훌훌』로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과 권정생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이자,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다. 작가는 당선작이 “부디 사람을 살리는 소설이 되기를 빈다”라고 작가의 말 말미에 밝혔다.
소설을 탈고한 뒤 밝히는 소회가 이토록 남다른 것은 지금의 시대가 겪는 중인 가슴 아픈 사건들과도 무관하지 않을 테다.
『지켜야 할 세계』는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고등학교 국어 교사 정윤옥의 삶을 찬찬히 톺는다. 윤옥의 인생이 나열되는 소설의 도입부에서 최근 일어난 여러 일을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죽음에 굴복해 버린 줄 알았던 한 인간이 실은 자신과 세상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음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는 독자에게 익숙하고도 낯선 질문을 건넨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세상이 바뀌고 사람이 변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지키고 싶은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
죽음까지 담담히, 자신의 길을 디뎌온 국어 교사 정윤옥의 마지막 한 해
윤옥은 중등 국어 교사로 고등학교에서 국어와 문학, 문법을 가르쳤다. 학교 관리자들은 윤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동료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어떤 이는 윤옥을 고집스럽고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어떤 이는 단단하고 외로워 보이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정년을 2년 앞둔 해에 윤옥은 2학년 문과반 담임을 고집한다.
교감의 회유에도, 은근한 협박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이유는 그 반에 시영이 있기 때문이다. 뇌병변장애를 앓는 시영은 동생 지호를 생각나게 했다.
부드러운 머리칼과 작게 내는 아아, 소리가 윤옥의 마음을 건드렸다. 지호와는 열 살 때 헤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방직공장에 다니게 된 엄마의 벌이로 겨우 살아가던 때였다.
지호는 하성호 목사가 운영하는 기적의 집에 보내졌다. 사범대학에 입학한 뒤에 찾아간 기적의 집에 지호는 없었다. “그런 애들은 원래 오래 못 산다.” 엄마의 한마디에 윤옥은 내내 걸려 있던 지호에 대한 기억을 억지로 삼킨다.
대학을 졸업한 후 부임한 학교에서 윤옥은 반가운 얼굴을 마주한다. 정훈이었다. 윤옥의 대학 동기인 정훈은 민들레 야학을 운영하고 있었다.
‘심장이 울리지 않느냐’는 정훈의 말과 당돌한 학생 수연의 태도에, 윤옥은 교원노조 가입 서류를 냈고 곧 학교에서 파면당한다. 정훈과 함께 세운 풀뿌리 서점과 야학 운영하는 일은 고단했지만 보람이 있었다.
그러나 당당한 태도로 민들레 야학을 자신의 세계, 해방구라 말하던 수연은 금이 가버린 후였다. 이 틈을, 상처 사이를 정훈이 파고들었다. 깨어진 수연과 함께 있는 정훈을 본 윤옥은 다시는 풀뿌리 서점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정년퇴직을 앞둔 시기, 이제 끝을 준비해야 하는 때에 익숙한 열정이 불같이 일어나는 이유를 윤옥도 알 수 없었다. 지나버린 시절에 제대로 된 작별을 고하지 않아서일까.
교감과 껄끄러운 인사를 나누고 돌아온 윤옥이 건네받은 낯선 서류 봉투, 거기에 든 엄마의 편지와 DVD. DVD 케이스에는 엄마가 손수 쓴 메모가 있었다. ‘편지를 읽기 전에 비디오를 먼저 보았으면 좋겠다.’ 지호를 보내고 살아남는 데에 생애를 바쳤던 엄마에게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켜야 할 세계』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영역을 철저히 사수한다. 끝까지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윤옥, 지호를 떠나보낸 후 생존이라는 목적만을 위해 움직이는 듯한 윤옥의 엄마 옥순과, 자신으로 살고 싶어서 아들 상현을 윤옥에게 보내는 수연이 그랬다.
그들의 세계는 다른 이들과 연결되면서 더 견고해지기도, 쉽게 허물어지기도 한다. 이런 연대의 기억은 삶의 다음 단계를 밟아 나아갈 힘, ‘우리’의 세계를 지킬 단단한 이유가 된다. 상현과 시영을 만난 윤옥처럼, 제주도의 또 다른 지호들을 만난 엄마가 그랬듯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친절하고 더 많이 행복하고 싶었다”
무너진 세계를 일으키는 오롯한 슬픔의 힘, 새로운 시대에 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소설
2023년 7월 18일, 서이초에 근무하던 젊은 교사가 스스로 세상을 떴다. 악성 민원이 원인이었다는 소문과 2년 차 새내기 교사라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이 일로 전 국민의 애도와 공분에 휩싸였다.
교사 집회가 일곱 차례 이어졌다. 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6만여 명까지 늘어났다. 학생들의 인권을 위해 모였던 교사들이 이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모였다.
그들은 같은 마음으로 애도하며 교권 확립을 위해 한 목소리를 냈다. 작가는 이 소설 부수고 다시 지으며 서이초의 선생님을 떠올렸다고 한다.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면, 당장 어둑한 교실로 들어가 그를 붙잡았을 거라고. 사는 것이 꺾이고 구부러지고 금이 가는 것일지 몰라도, 죽지 말라고. 이 밤을 버텨내라고.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을 맺는 이 소설은 어쩌면 읽는 이를 살릴지도 모르겠다. 온전히 자신으로 살라고, 그런 고집이 당신의 세계를 지키는 일이라고 토닥이는 소설이기에.
문경민 작가는 말한다. "내가 무엇을 썼는가 되짚어 생각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또렷한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서 촛불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소설을 부수고 다시 짓기를 반복했던 지난 7년 동안 한 번도 찾아들지 않았던 이 소설에 대한 확신이, 49일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야 부드러운 손을 내밀 듯이 내게 찾아들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더는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지켜야 할 세계』는 죽음의 순간까지 담담히 삶의 길을 걸어왔던 한 사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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