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험은 우리의 삶을 영원히 바꾸기도 한다”
해외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이 있다. 1995년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으로 데뷔 직후 펜/헤밍웨이상 등 주요 문학상 6개를 휩쓸며, 일약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반열에 오른 이창래.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서 위안부의 참상에 충격을 받아 집필한 『척하는 삶(A Gesture Life)』,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쓴 『생존자(The Surrendered)』, 이민자 소녀의 환상적인 모험을 그려 낸 『만조의 바다 위에서(On Such a Full Sea)』 등으로 퓰리처상, 전미 비평가협회 소설 부문, 카네기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작가다.
집필 기간이 긴 과작 성향으로 지난 30여 년간 단 다섯 편의 작품을 발표했음에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는 등 세계 문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온 이창래가 여섯 번째 장편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My Year Abroad)』으로 한국 독자들을 만난다.
2014년 『만조의 바다 위에서』 이후 9년 만에 출간되는 신작이기에 오랫동안 이창래 작가를 따라 읽어 온 팬이라면 더욱 반길 만한 소식이다.
『타국에서의 일 년』은 자신이 속해 있는 현실과 이 세상에 어떠한 소속감도 느끼지 못하는, 그러다 우연히 만난 타인에게 이끌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등지고 ‘낯선 세계’로 떠나 버린 이의 여정을 다룬다.
데뷔 이래 극적인 격동을 겪어 낸 한국 근현대사와 그 역사를 살아 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민자들의 삶과 마음을 대변해 온 전작들과 달리,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MZ세대 청년을 등장시켜 색다른 서사를 선보인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은 운명적 만남과 타국에서 보낸 일 년의 시간, 동서양을 종횡무진하는 장대하고 흡인력 넘치는 서사를 통해 작가는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줄까.
도무지 정착할 수 없는 무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한 번쯤 떠나고 싶은 갈망을 가져 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사라지고 싶었다. 삶으로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삶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타국에서의 일 년』의 주인공은 20대 청년 ‘틸러 바드먼’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나는 ‘네.’라는 대답의 순수한 화신이었다.”라고 평하는 그는 한국인의 피가 아주 조금 섞인, 거의 백인과 구분되지 않는 혼혈인이다.
대학교 도시 ‘던바’ 출신인 틸러는 자산가가 많은 이 도시의 친구들처럼 어려서부터 유복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기업 관리직인 아버지 덕에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틸러가 느끼는 결핍은 주류가 아닌 인종이나 경제적인 측면보다는 “무한히 펼쳐지는 허무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던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경험에서 나온다.
틸러는 사라진 어머니를 대신해 싱글대디로 자신을 돌봐 온 아버지의 사랑도 추상적이라고 느끼며 부자 관계에서 언제나 선을 지킨다. 그는 분명 상대적으로 평탄한 상황에 있었지만, 자신이 속한 곳에 완전히 뿌리내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고여 있는 물에 떠 있는 나뭇잎처럼, 그 물이 흐르지 않는 한 가만히 있겠으나 누군가가 건져 내면 쉽게 건져질 수 있는 존재였던 셈이다.
마치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는 사람처럼, 어디서도 감정적인 애착이나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던 틸러에게 어느 날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이자 거대 제약회사 베이더가스의 실험실 화학자 ‘퐁’이 나타난다.
퐁 또한 틸러에게 미묘한 유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네 안에는 어떤 절박함이 있어, 틸러. 일종의 허기가 있지. 넌 그게 뭐라고 생각해?”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의 동료들과 함께 해외 투자 여행에 동행하기를 제안한다.
자신의 초라한 현실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떠나고 싶었던 틸러는 큰 고민 없이 퐁의 조수로서 그 여행에 따라나선다. 마치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 채 파도를 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회오리치는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사람처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서.
그리고 중간기착지인 하와이를 거쳐 중국 선전, 마카오, 홍콩 등 동아시아의 화려한 무역 도시들을 배경으로 어딘가 수상하고 때론 기이하기까지 한 이들의 여정이 펼쳐진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MZ세대에게
‘디아스포라 문학의 거장’이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밀리언셀러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과 함께 1.5세대 한인문학을 이끈 양대 산맥이자, 현대 영미문학의 대가로 평가받는 이창래는 스스로 어디에도 완벽히 속할 수 없는 ‘경계인’으로서 누구보다 치열히 세상과 부딪혀 온 작가다.
그로부터 비롯된 깊고 섬세한 통찰력, 아름답고도 날카로운 문체와 탄탄한 드라마 등으로 도스토옙스키, 가즈오 이시구로, 코맥 매카시 등과 비견될 만큼 미 문단은 물론 전 세계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온 그는 이번 신작에서도 국경과 언어,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끊임없이 진화하는 작가의 면모를 아낌없이 펼쳐 보인다.
이 소설의 제목 『타국에서의 일 년』은 우리의 낯선 경험을 은유한다. 젊음이 가져다주는 고뇌와 혼란, 시공간적 경계를 허무는 자유로움이 모두 담겨 있는 이 소설은 특히 ‘나’를 찾아 새로운 세계를 향해 무한히 나아가는 MZ세대 독자들에게 주는 울림이 크다.
이 책은 오랜 시간 프린스턴과 스탠퍼드대학교 강단에서 학생들과 소통하고 교감해 온 작가가 청년들에게 보내는 한 편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어디로든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부유하는 계절. 디아스포라 문학의 거장 이창래가 이끄는 여정을 따라, 완벽히 낯선 소설적 세계 속 이방인이 되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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