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는 최진영이었다. 2006년 [실천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2010년 첫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린 지 10여 년.
지독한 비관의 세계에서 시작한 그는 “등단 이후 10여 년간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걸어온 작가의 작품 세계가 마침내 새로운 경지로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눈이 부시다”(소설가 윤대녕)라는 평을 받기에 이른다.
불멸하는 사랑의 가치를 탁월하게 담아낸 『구의 증명』,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은 혼란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아포칼립스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내밀한 의식과 현실을 정면으로 주파한 『이제야 언니에게』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거침없는 서사와 긴 여운을 남기는 서정으로 그만의 세계를 공고히 했다.
상실을 경험한 여성, 학대 가정에서 자라난 소녀, 비정규직 청년 등 폭력과 고통의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따스한 진심을 담으려 한 그의 이야기는 내내 주목받고 신뢰받았다. 그럼에도 어떠한 동요 없이 어떠한 소비 없이 묵묵히 쓰기를 계속해온 작가. “쓰다 보면 견딜 수 있다”라는 그의 말은 “최진영은 끝까지 우리 삶의 전부를 써낼 것이다”(소설가 황현진)라는 말로 통한다.
이런 그가 2년여 만에 발표하는 신작 장편소설 『단 한 사람』으로 한발 더 나아갔다. 지구에서 가장 키가 크고 오래 사는 생물, 수천 년 무성한 나무의 생 가운데 이파리 한 장만큼을 빌려 죽을 위기에 처한 단 한 명만 살릴 수 있는, 나무와 인간 사이 ‘수명 중개인’의 이야기다.
열여섯 살 목화는 꿈을 빌려서 그러나 현실처럼 생생한 순간들을 목격한다. 투신과 살해, 사고사와 자연사 등 무작위한 죽음의 장면. 동시에 한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구하면 살아. 나무의 알 수 없는 소환은 이어지고 일상은 흔들린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을 살려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 일은 대를 이어온 과업. 할머니인 임천자는 이를 기적이라 했고, 엄마인 장미수는 악마라고 했다. 이제 목화는 선택해야 한다.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
신에게는 뜻이 있는가?
사람은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신념과 사랑 없이 인간은 살 수 있을까?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묵직한 주제와 더불어 문명과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임은 물론, ‘수명 중개’라는 판타지적 요소까지 더해 읽는 재미가 배가된다. 최진영 소설 세계의 전환점이 될 『단 한 사람』은 작가가 3년 전 착안해 지난 1년간의 집필 끝에 출간하는 전작 소설이자 여덟 번째 장편이다.
“오직 너라는 한 존재를 바라보고 있다고”
최초에 씨앗에서 움튼 어린 두 나무가 있었다. 부족함을 모르고 무럭무럭 자라 천재지변을 견디고 장엄한 숲이 된. 그러나 두 발로 걷는 희귀한 종족 인간이 나타나고 나무들은 차례로 쓰러진다. 사람에게 파괴된 적이 있는 나무, 그 나무는 그 자리에서 어떤 사람을 파괴한 적이 있다. 장미수와 신복일은 결속하여 일화, 월화, 금화, 쌍둥이 남매 목화와 목수를 낳는다.
어느 날 꼬마 금화와 쌍둥이는 홀린 듯 그 숲속으로 향한다. 산을 오르던 금화의 머리 위로 나무가 우지끈 기운다. 목화는 어른을 부르러 산 아래로 뛰어가고 다시 돌아왔을 때 금화는 온데간데없다. 금화의 실종 후 가족들은 죄책감으로 고통 속에 살아간다.
목화가 열여섯이 되던 봄, 꿈인 듯 눈앞으로 투신의 장면들이 펼쳐진다. 그 죽음을 목도하다가 목소리를 듣는다. 가서 그를 구하라는 말. 망설이다가 목화는 달려간다. 열기와 함께 사뿐 내려앉는다. 그는 조금의 부상만 입은 채 살아난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재차 그 세계로 ‘소환’되고 나서야 이 일이 꿈이 아님을 안다. 깨어나 우는 목화를 보고 엄마인 장미수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다. 차라리 금화이길 바랐는데. 장미수는 열다섯부터 사람을 구했던 것. 장미수에게는 구할 수 없는 너무 많은 죽음에 비해 살릴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겨우’에 불과했다.
패배감과 무력감에 신을 저주한 장미수와 달리, 할머니 임천자는 단 한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둔다. 목화는 첫 소환에서부터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나무”의 존재를 느낀다.
의심과 반항과 시험도 있었지만 “무성한 생에서 나뭇잎 한 장만큼의 시간을 떼어 죽어가는 인간을 되살리는 존재”인 ‘중개인’의 정체성을 체화해 간다. 소환하는 그 나무를 잘 알고 싶어 목공소에서 일한다.
그러던 중 일화의 딸인 루나의 자살을 막게 되고 중개 때 목화를 봤다는 루나의 말에 놀라 그가 이제껏 살린 ‘단 한 사람들’을 찾아가보기로 한다. 살아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평범한 그들의 일상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타인의 삶과 죽음에 판단을 멈춘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마음을 다해 명복과 축복을 전하는 일.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난 사람의 미래를 기원하는 일”을 한다. 임천자의 평온한 죽음 이후, 목화는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의 의미를 스스로 구한 것이다. 한 번뿐인 삶, 다시없을 오늘을 사는 한 존재, 그것은 신도 나무도 범접하지 못하는 오직 인간의 몫임을 깨닫는다.
소설가가 세계를 호명하는 아름다운 방식
엄청난 수령의 나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악행을, 나약함을, 순수함을, 서로를 돕고 아끼는 모습을, 사랑하고 기도하다 어느 날 문득 사라져버리는 찰나의 삶을”(‘작가의 말’에서) 다 보았을 거라고 작가는 말한다. 나무의 눈에서 보자면 인간은 순간을 사는 존재일 뿐이라고.
압도적인 자연의 스케일 가운데서 인간이란 미약하지만 그 ‘단 한 명’들의 낱낱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 또한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하다. 목화가 중개에서 깨어난 뒤 장소를 유추해 죽은 자들의 마지막 자리를 찾아가 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어떤 이는 새벽 가로등 빛이 닿는 건물 입구 계단 벽에 기대어 홀로 죽었다. 어떤 이는 늦은 밤 갓길에 세운 자동차 안에서 쪽잠을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 어떤 이는 이른 새벽 눈을 떠 옆에 누운 반백 년 넘게 함께한 얼굴을 한번 보고 편안한 잠 속에서 심장이 멈췄다.
사고 현장 혹은 폭력 속에서 사라진 원통한 죽음과 충분히 생을 누려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 등등 그 모든 마지막을 목화가 끝까지 보았다. 죽은 자가 한 대로 건물 계단에 잠시 기대었다가 떠날 때 생수 한 통을 남겨두고 오는 목화의 발걸음에서 가까스로 살아가는 인간을 향한 작가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작가가 부려놓은 이 세계를 통해 독자는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하나의 그릇에 담긴 나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단 한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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