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분기점을 2003년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상영된 해다. 이듬해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로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고, 봉준호 감독은 2019년 〈기생충〉으로 같은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은관문화훈장도 받았다. 2020년 2월에는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4관왕의 쾌거를 이뤘다.
영화 창작을 가르치는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봉준호와 박찬욱을 하나의 장르로 분류하기 시작한 해였다. 숫자로만 따지면 2003년이 특별했던 건 〈실미도〉라는 영화 때문이다.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 신화가 탄생한 것.
그렇다면 우리나라 공연예술사의 분기점은 어디였을까. 개인적으로 2001년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의 공연예술사에서 2001년이 특별한 이유는 뮤지컬이 비로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주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이때 무대에 올려졌다. 설앤컴퍼니가 제작하고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이 번안뮤지컬은 제작비 150억 원, 유료관객 24만 명을 끌어모았다.
유료관객 24만 명이라는 수치는 당시 모든 박스의 94%가량의 기록적인 객석점유율로 인한 것이다. 7개월간의 장기 공연으로 매출이 192억 원, 순이익은 30억 원에 육박했다. 투자사들도 11개월이라는 짧은 투자 기간에 투자 대비 30%의 수익금을 챙길 수 있었다. 안정적인 공연 연습 기간도 인상적이었다.
이후 2004년 〈맘마미아〉의 흥행 돌풍 역시 앞선 〈오페라의 유령〉의 성공이 없었다면 설명하기 어렵다. 〈맘마미아〉는 국내 초연 2년 전부터 홍보를 해 20만 관객을 모았다. 무엇보다 뮤지컬 수용자를 중장년층으로 확대한 건 대단한 성과다. 역대작품에 대한 관객 평점으로도 부동의 1위다. 〈오페라의 유령〉이 산업화의 기폭제였다면 〈맘마미아〉는 대중화의 촉매제였다.
〈오페라의 유령〉은 한국 뮤지컬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이후 대기업이 공연예술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자본이 움직이는 원리는 늘 간단하다. 돈이 되거나 장기적으로 기업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 무렵부터 실내 공연예술을 위한 중대형 전문 공연기획사와 전문공연장이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세워지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유령〉이 탄생했던 2001년은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를 받은 지 3년 차 되는 해였다. 살인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빚을 모두 갚은 해였기에 어느 때보다 시민들의 살림살이가 팍팍했다.
당시 엥겔지수가 13.8%로 기록적인 수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페라의 유령〉은 궁핍 위에서 시장을 탄생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500만 관객층을 보유하고 있었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뮤지컬 인구는 30만 명에 불과했다.
2000년 무렵의 뮤지컬 시장 규모가 140억 원가량이었는데, 〈오페라의 유령〉 이후 매해 20%씩의 급성장을 이룬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비록 최근 3년여간은 코로나 국면으로 잠시 침체되긴 했지만 엔데믹 시대로 전환되면서 2023년을 기점으로 다시 5천 억 원 시장으로 향하는 기대감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성공이 남긴 그늘도 있다. 〈오페라의 유령〉은 라이선스 작품 티켓값을 10만 원 이상으로 고착시킨 결과도 가져왔다. 그전에 공연되었던 〈아가씨와 건달들〉, 〈시카고〉, 〈올 댓 재즈〉가 모두 6~7만 원의 가격이었던 것에 비해 〈오페라의 유령〉은 R석이 10만 원, VIP석은 무려 17만 원이었다.
〈오페라의 유령〉도 프랑스 와인의 상륙 과정과 비슷했다. 국내 상류층들의 명품문화의 상징으로 마케팅 되었고, 10만 원이 훌쩍 넘는 티켓값을 두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다. 명품문화를 소비한다는 것은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과 같다. 최초의 라이선스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캣츠〉, 〈맘마미아〉, 〈미녀와 야수〉, 〈지킬 앤 하이드〉 등 수백억 규모의 뮤지컬 탄생의 전초가 된 작품이다. 팬텀 역의 윤영석, 크리스틴 역의 김소현, 라울 역의 류정한이 스타덤에 올라 ‘뮤지컬 스타’들도 이내 두각을 드러냈다.
물론 작품성과 공연사적 가치로 보면 〈아가씨와 건달들〉(1983년), 〈캣츠〉(1991),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91), 김민기의 〈지하철 1호선〉(1991)은 물론, 〈사랑은 비를 타고〉, 〈명성황후〉, 〈난타〉, 〈브로드웨이 42번가〉, 〈페임〉 등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김종욱 찾기>는 뮤지컬 최초로 영화화되면서 당시 장유정 연출가가 영화감독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활약했고, 최근에는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 역을 맡은 정성화 배우가 영화에서도 주인공을 맡아 화제가 된 바 있다.
2001년은 영화산업에서도 특별한 해였다. ‘프로도 경제효과(Frodo Economy Effect)’라는 말이 있다. 영화 한 편이 작은 나라의 경제 전반을 바꾼다는 이야기로, 짐작했겠지만 여기서 프로도는 2001년에 상영되었던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의 주인공이다.
*프로도 경제효과(Frodo Economy Effect) |
프로도(Frodo)는 제 7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11개 부문을 휩쓸었던 영화 <반지의 제왕> 등장인물. <반지의 제왕>은 뉴질랜드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영화 덕분에 뉴질랜드가 막대한 경제적 파급 효과를 얻게 되어 이를 '프로도 경제효과(Frodo Economy Effect)'라고 부르게 됨. |
〈반지의 제왕〉은 뉴질랜드의 신비로운 대자연과 동화와 같은 판타지적 장소들로 가득하다. 당시 인구가 400만 명에 불과했던 뉴질랜드에서 영화제작팀이 현지에서만 2억 5천만 달러를 사용했고, 그 결과 1만 5천 명에 대한 직접적인 고용효과를 가져왔다고 알려졌다.
중요한 것은 단기 투자가 아닌 장기 효과다. 영화 개봉 그 후,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관광지로 꼽히게 되었고, 뉴질랜드의 섬 마타마타엔 호빗집, 웰링턴의 웨타 케이브엔 영화의 주요 장면을 소환하려는 관광객이 줄을 이었다.
2019년 기준으로 영화 〈아바타〉는 수익이 27억 8,796만 달러였고,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25억 4,216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렇다면 뮤지컬은 영화와 비교해 어림도 없을까?
뮤지컬 〈라이온 킹〉(1997)의 흥행 수입이 2017년을 기준으로 79억 달러, 우리 돈으로 8조 5천억 원이 넘는다. 〈오페라의 유령〉(1986)은 30년간 56억 달러, 우리 돈으로 6조 6,164억 원을 벌어들였다. 1997년 초연한 〈라이온 킹〉이 〈오페라의 유령〉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인 이유는 높은 티켓값과 객석 규모의 차이였다.
뮤지컬을 조금이라도 아는 독자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영화는 상영관에서 내려가면 IPTV나 넷플릭스와 같은 시장으로 옮기고 그것도 2년이 지나면 모두 추억의 영화로 분류된다. 하지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지금까지도 흥행 신화를 이어 가고 있다.
〈라이온 킹〉 역시 20년간 19개국 9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지금 대학로에 가면 오픈런으로 공연되는 연극과 뮤지컬이 십 수년째 흥행 신화를 구가하고 있고 객석도 가득 차기 시작한다. 특히 인기 있는 작품이거나 스타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이면 매진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대학로 외에도 곳곳에 좋은 시스템을 갖춘 중소형 공연장이 늘어난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뮤지컬의 티켓값은 영화의 5~10배 정도이다. 영화가 3만 원이라면 객석이 비겠지만, 뮤지컬의 경우 20만 원짜리 티켓도 선뜻 구매한다. 백 스테이지 체험과 주연배우와의 사진 촬영 등의 상품을 얹은 50만 원짜리 VIP 티켓에도 지갑을 여는 충성 관객층이 존재한다.
2015년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라이프〉 관람객에 대한 인터파크의 결산 통계가 흥미롭다. 최다 관람객을 찾는 이벤트를 열자 놀랍게도 51회 관람을 한 관객이 있었고, 〈마마 돈 크라이〉의 경우 79%의 재관람률을 기록했다.
뮤지컬 극장을 찾은 관람객 3인 중 1인은 동행인이 없는 ‘1인 관객’이었다. 1인 관객은 주변의 권유나 가족, 연인과의 약속과 상관없이 뚜벅뚜벅 홀로 극장을 찾아가는 마니아층이다. ‘회전문 관객’이라고도 한다.
2023년이 시작된 최근에는 더 비싸진 티켓 가격도 있지만 '혼공' 관객도 많이 늘어났다. 이들 혼공족은 회전문관객과는 또 다른 이유로 마니아 층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회전문 관객 |
한 작품을 캐스팅 배우별로 계속 보는 마니아층 관객. 특히 뮤지컬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로 10~20번은 우습고, 장기 공연에선 100번 이상 반복 관람하는 경우도 있다. 공연계에서는 ‘전 캐 찍기(모든 캐스팅을 다 관람하기)’라는 은어까지 등장했다. 회전문 관객이 증가하면서 이들을 겨냥한 마케팅도 진화하고 있다. ‘재관람 할인’은 뮤지컬계의 일반적인 마케팅.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마시면 도장을 찍어 주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헤드윅〉 제작사 쇼노트가 2005년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
뮤지컬의 라이선스와 머천다이징(merchandising) 시장을 감안하면 그것의 경제효과는 거의 항구적이다. 로열티(라이선스 비용)는 티켓 한 장마다 청구되는데, 통상 티켓 가격의 12~18%는 로열티라고 보면 된다.
가령 15만 원 티켓이라면 1만 7천 원 정도는 달러로 지불된다. 뮤지컬의 본고장 미국과 영국에선 작가들의 저작권, 인격권을 모두 라이선스 관리회사에서 전담한다. 라이선스는 창작자에겐 꽤 높은 수입원이지만, 수입자에겐 큰 부담 요소가 된다.
최근에는 국내 창작 뮤지컬의 수준이 높아졌고, 케이컬처의 확장으로 라이선스 공연이 다소 축소된 상황이다. 과거의 영화계에서 스크린쿼터제를 계기로 한국 영화가 외국영화보다 우수해진 결과로 분석하는 전문가도 있지만 지금 뮤지컬 시장이 그 과도기의 끝자락을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뮤지컬, 연극, 오페라, 클래식 등의 무대의 마력이 영화나 TV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도 공연예술이 살아남은 원초적인 힘이다. 몽골 초원의 밤, 화염이 불타오르고 제사장과 부족민이 춤을 추었던 그 순간부터, 우리 선조들이 단옷날 줄타기를 하고 탈춤을 놀았던 그 시절부터 인류의 공연예술의 형태는 진화했지만 그 본질인 ‘연희’와 불꽃처럼 강력한 인상을 남기고 사라지는 ‘소멸성’이라는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오케스트라, 발레, 뮤지컬을 TV로 볼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현장에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채우는’ 차선일 뿐. ‘직접 봐야 느낀다’는 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렇게 보면 한국 공연예술 시장의 전망은 무척이나 밝은 것 같다. 이제 곧 5천억 원대의 시장으로 진입한다고 하는데, 소위 잘나가던 공연기획자, 공연계 스타 프로듀서들이 채무에 허덕이다 유명을 달리하는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일까?
왜 프로덕션 데스크에 앉아 무대를 노려보는 연출가를 꿈꾸던 청년이 연봉 5백만 원의 출연료를 받으며 밤을 새야 하는지. 뮤지컬 스타를 꿈꾸는 30대 여배우가 교통비는 언감생심, 하루 몇 만 원의 출연료를 받으며 부천에서 대구까지 내려가 무대에 서며 당장 이번 달의 월세를 걱정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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